
솔직히 저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보기 전까지 해고 문제를 다룬 영화가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간 제지회사에서 일하던 만수가 해고 통보를 받고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202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이 작품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현대 노동시장의 구조적 모순을 세 겹의 이야기로 풀어낸 수작입니다. 제가 예전에 직장 선택으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주인공이 현실적 조건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제로섬 게임에 갇힌 해고노동자들의 비극
영화는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제로섬(Zero-sum)이란 한정된 자원을 놓고 누군가의 이득이 곧 다른 누군가의 손실이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5년간 특수지 제조 업무를 담당하다 정리해고를 당합니다. 특수지란 일반 인쇄용지가 아닌 산업용, 포장용 등 특수 목적에 쓰이는 종이를 뜻하는데, 이 분야는 숙련도가 높아야 하지만 대체 인력도 많은 모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극 중 만수가 면접을 본 파피루스라는 제지회사에서는 입사 지원자 중 1등이 법모, 2등이 시조였고 만수는 탈락했습니다. 그런데 만수는 이 두 사람을 먼저 죽인 뒤 마지막으로 현직자인 선출을 제거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저는 이 설정을 보면서 묘하게 불편했는데, 법모와 시조는 애초에 문재지라는 회사의 자리를 노리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들은 파피루스 합격 여부도 모른 채 살해당했으니 사실상 '잠재적 경쟁자'를 미리 제거한 셈입니다. 이런 구조가 왜 문제인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리 창출 가능성은 배제되고 고정된 일자리만 전제됨
- 직종 전환이나 재교육 같은 사회적 해법은 고려되지 않음
- 노동자끼리의 경쟁만 부각되고 고용주의 책임은 사라짐
2024년 기준 우리나라 비정규직 비율은 36.3%에 달하는데, 영화는 바로 이 불안정한 고용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이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일부에서는 이 영화가 계급투쟁을 다루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노-노 갈등(노동자 대 노동자 갈등)에 집중한 점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정리해고 상황에서 동료들끼리 서로를 견제하고 의심하게 되는 일은 흔하니까요.
나무 아래 묻힌 세대를 관통하는 비밀
제지업계를 다룬다는 설정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 은유입니다. 제지공정(Paper manufacturing process)이란 원목을 벌채해 펄프로 만들고 다시 종이로 생산하는 순환 구조를 말하는데, 여기서 벌목은 곧 해고를 상징합니다. 영화 속 만수는 취업 상태일 때 콧수염을 기르고 해고 후에는 민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나무가 베어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장치입니다. 선출이 유튜브 홍보 영상에서 "제지용 나무는 따로 심어서 베고 또 심는 무한 재생 사이클"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교체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만수의 아버지 이야기가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돼지 농장 주인이었는데, 2만 마리의 돼지를 구제역으로 살처분해야 했고 결국 창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만수는 9살 때 이 일을 겪은 뒤 집을 잃고 매년 이사를 다녀야 했죠. 수십 년 뒤 만수는 그 집을 다시 사들이고 아버지가 죽은 창고를 허물고 온실을 짓습니다. 온실(Greenhouse)이란 식물 재배를 위한 유리 구조물인데, 여기서는 죽음의 공간을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만수는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가져온 북한제 권총으로 세 명을 살해합니다. 영화 중반 교차편집 시퀀스에서는 만수가 시조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과 아들이 핸드폰 대리점을 터는 장면이 동시에 펼쳐지는데, 이는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에 걸친 범죄가 한 축으로 꿰어지는 순간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아들이 훔친 핸드폰, 아버지가 매립한 돼지, 만수가 묻은 시신이 층층이 쌓여 있죠. 일각에서는 이 설정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오히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느껴졌습니다.
복원된 낙원은 정말 낙원인가
영화는 만수가 완전범죄에 성공하고 가족과 포옹하며 새 직장에 출근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균열이 드러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의심하고, 아내는 남편의 범죄를 눈치챈 듯하며, 만수 자신은 9년간 지켜온 금주를 깨뜨렸습니다. 더구나 새 직장인 문재지에는 'AI 소등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어 조만간 또다시 해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공장 불빛이 하나씩 꺼지며 만수가 어둠 속에 잠기는 연출은 그의 미래를 암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결말이 너무 처연하게 느껴졌습니다. 만수는 세 사람을 죽여가며 얻은 자리에서조차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니까요. 일부 관객들은 주인공이 너무 쉽게 상황에 굴복한다고 비판하는데, 저는 그게 오히려 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대량해고 상황에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생각보다 훨씬 적으니까요. 영화가 "어쩔 수 없다"는 제목을 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과연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요? 만수는 파피루스 면접에서 농담을 잘못해 떨어졌고, 가짜 회사 '레드페퍼'를 만들어 경쟁자를 유인했으며, 결국 자신의 미래를 닮은 선출까지 죽였습니다. 이 모든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도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노동자가 고용주를 상대로 싸웠다면, 이번에는 노동자끼리 싸우는 구조로 바뀌었죠. 이는 20년 사이 한국 노동시장이 얼마나 더 잔혹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영화 속 만수는 마지막 출근길에서 제지롤을 나무 막대로 톡톡 두드리는 옛 습관을 반복하는데, 이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노동 관행입니다. 그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방식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쩔수가없다'는 선택의 자유가 박탈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극적인 길로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정말 어쩔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예전에 현실적 조건 때문에 내렸던 선택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듭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과 '박쥐'를 함께 보시면 그의 세계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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